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왜 전쟁 (문단 편집) === [[신라]]-[[왜국|왜]] 관계의 악화 === 4세기 초중반부터 [[신라]]와 [[왜국]] 간의 관계는 이미 악화되고 있었다. 344년([[흘해 이사금]] 35년) 2월, 왜국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공주와의 혼인을 청하였으나 신라 측에서는 공주가 이미 기혼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왕은 이듬해인 345년 2월 서신을 보내 [[국교]]를 끊었고, 346년에는 신라의 풍도(風島)로 군사를 보내 변방의 백성들을 노략질한 뒤 [[서라벌]]을 포위하였다. 흘해 이사금은 [[이벌찬]] 강세(康世)의 간언에 따라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성문을 굳게 닫아두었고, 왜군이 퇴각하려 하자 정예 [[기병]]으로 공격해 격파하였다. 본격적인 충돌의 시작은 다음 왕인 [[내물 마립간]] 시기부터였다. 364년 4월, [[왜국]]이 군사를 대거 일으켜 신라에 이르렀다. 이를 들은 내물 마립간은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든 뒤,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병사로 위장시킨 채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두었다. 무리가 많다고 착각한 왜군들이 진격하자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매복하고 있던 신라군 1,000명이 불시에 기습하였고, 뒤늦게 달아나는 왜군들을 추격하여 죽임으로써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비록 신라가 결과적으로 승전하기는 했지만, 정면 대결이 아닌 [[농성]] 및 전술을 통해 격퇴해야 했다는 점을 통해 왜의 침략이 이전에 비해 본격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서는 위 전투에 대해 "신라군의 왼쪽이 빈 것을 눈치챈 타지(田道)가 날랜 기병을 이끌고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신라군을 무너뜨렸다"며 다소 상반되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364년경 왜군의 대규모 침략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명확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